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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조용한 소녀의 내면을 비추는 섬세한 성장 서사

by sunnyday15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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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조용한 소녀의 내면을 비추는 섬세한 성장 서사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한국 독립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한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1994년의 서울, 그 안에 담긴 가족, 학교, 사회의 모습을 정밀하게 관찰하면서도, 그 안에 한 사람의 성장과 상처를 아름답게 담아냈다. 이 영화는 겉보기에는 매우 조용하지만, 실은 깊고 넓은 감정의 파동을 품고 있다.

 

주인공 은희(박지후)는 중학생이다. 가족 안에서의 위치는 애매하고, 학교에서는 폭력과 무관심 속에 놓여 있으며, 사랑이라는 감정도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시기다. 그녀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외로움, 갈망, 혼란이 서려 있다. 카메라는 은희의 뒤를 조용히 따라간다. 큰 사건이 없는 듯하지만, 그녀의 눈빛과 표정, 주변 풍경에서 일상의 균열이 느껴진다.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은희의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다. 그녀는 은희에게 처음으로 ‘존중받는 느낌’을 선사하는 사람이다. 영지는 말없이 은희의 말을 들어주고, 따뜻한 눈빛을 건네며, 소녀가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이 관계는 단순한 교사와 학생을 넘어,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한 아이의 절절한 욕망을 상징한다.

 

은희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은 무력감이 아닌 관찰과 내면의 싸움이다. 가족은 폭력적이거나 무심하고, 친구들은 자기 문제에 갇혀 있으며, 연인은 떠나버린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그 불안을 현실로 끌어오고, 은희의 삶은 더는 예전 같지 않다.

 

『벌새』는 화려한 연출도, 과장된 연기도 없다. 대신 시간의 흐름과 소녀의 숨소리, 일상의 파편들이 정교하게 쌓여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은희가 조금 더 단단해졌음을, 비록 슬픔을 품었지만 세상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음을 느낀다. 이는 성장에 대한 가장 조용하고 강한 선언이다.

 

이 영화는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말 못할 성장통’에 대해 말한다. 은희는 울지 않지만, 보는 우리는 울게 된다. 벌새는 날개를 천 번이나 떨어야 겨우 날 수 있다. 그 작은 존재의 고군분투를 따라가는 이 영화는, 결국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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