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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들은 한 마디

by sunnyday15 2025.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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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들은 한 마디

 

퇴근길, 늘 타던 버스 안. 오늘따라 사람이 많았다. 간신히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 한 분이 나지막이 말했다.
“참, 오늘 날씨 좋네.”
나는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웃으며 “네, 정말요”라고 대답했다. 그 짧은 대화 하나에 마음이 풀렸다. 어쩐지 오늘 하루종일 긴장되고 단절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 말 한마디에 고요하게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스르륵 녹는 것 같았다.

 

도시의 일상은 대부분 무표정하고 빠르다. 서로를 잘 모른 채, 마주쳐도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것이 익숙해진다. 아침 지하철에선 대부분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고, 식당에서도 말 없이 밥만 먹고 나오는 풍경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오늘, 그 짧은 한 마디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말이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그 순간, 나는 존재를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당신도 여기 있군요”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이 도시 속 어딘가에서 나는 투명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할머니는 잠시 후 버스에서 내렸고, 나는 여운이 남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분홍빛 노을로 천천히 물들어가고 있었고, 거리엔 퇴근길 사람들의 걸음이 분주했다. 그 풍경은 매일 같았지만, 오늘은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감정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나 역시 한때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지하철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괜찮니?”라고 조심스레 다가갔던 기억, 길을 헤매던 외국인에게 길을 알려주며 잠시 수다를 나눴던 기억. 그때 그 사람들도 나처럼 따뜻함을 느꼈을까?

 

우리는 너무 자주 타인과 단절된 채 살아간다. 말 한마디면 충분히 연결될 수 있는데도, 조심스럽고 쑥스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실은 다들 말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집에 도착하고, 이불 속에 누워 오늘 있었던 짧은 순간을 되새겨봤다. 하루종일 일에 치이고 지친 하루였지만, 그 짧은 인사 하나가 하루를 다시 따뜻하게 기억하게 해줬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하게 지나치기보단, 때때로 다정한 말을 건네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오늘 나 자신에게는 어떤 말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남에게는 다정하려 애쓰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 냉정하지 않나. 실수한 하루, 무기력했던 나날, 의욕이 안 나던 오전, 그런 나에게 “괜찮아, 그런 날도 있지”라고 다정하게 말 걸어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내일 아침 버스 안에서는 조금 더 여유롭게 앉아, 옆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며 다정한 마음을 품어보려 한다. 굳이 말을 걸지 않더라도, 따뜻한 시선 하나면 충분하다. 세상은 생각보다 더 많은 다정함으로 이뤄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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