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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걷는 날

by sunnyday15 202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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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걷는 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걷고 싶어진다. 목적지 없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아침부터 특별한 계획이 없었던 주말, 방 안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어보니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다. ‘밖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핸드폰은 가방에 넣은 채 집을 나섰다.

처음엔 동네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예전에는 눈에 잘 띄지 않던 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길모퉁이에는 새로 생긴 카페가 보였다. 창문 안쪽으로 사람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그 따뜻한 분위기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평범한 풍경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걷다 보니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고민들, 뾰족하게 남아 있던 감정들이 걸음에 묻혀 사라지는 듯했다. 이직을 고민했던 일, 친구와의 대화에서 마음에 걸렸던 말,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의 속도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흘러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급함보다는 묘한 여유가 생겼다. 그냥 걷는 행위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걷다 보니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에 도착했다. 벤치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커피를 마시며, 바람을 느꼈다. 봄바람은 그 자체로 충분히 위로가 된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 벨 소리. 세상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내 마음만은 잠시 멈춰 있었다. 가끔은 멈추어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단순히 ‘존재하고 있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

 

혼자 걷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에 몰입한 얼굴이었고, 또 누군가는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와 손을 잡고 걷는 부부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각자 다른 이유로 이 길을 걷고 있었지만, 모두 그 순간만큼은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예전엔 혼자 걷는 일이 외롭고 의미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걸음 하나하나가 내 삶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결핍으로 여기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고요함 속에서 내가 나와 만나는 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혼자 걷는 길 위에서 오히려 더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걷는 도중, 작은 서점 하나를 발견했다. 들어가 보니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책 냄새가 가득했다. 오래된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걷다가 에세이 한 권을 골라 들었다. 서점에선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 그곳에서 마주친 글귀 하나가 마음을 찔렀다.
“삶이 막막할 땐, 걸어라. 길 위에서 스스로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너무도 단순한 말이었지만, 지금 내게 꼭 필요한 문장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책장 사이에 앉아 책을 읽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집을 나선 날, 내게 가장 필요했던 말을 만난 건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점에서 나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여전히 가볍고,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져 있었다. 걷는다는 건 단지 다리를 움직이는 게 아니다. 감정을 풀고, 기억을 정리하고, 삶을 되새기는 일이다. 누군가는 그걸 명상이라 부르겠지만, 내겐 그저 ‘산책’이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

 

저녁 무렵 집에 돌아오는 길,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집안일을 하거나 핸드폰만 보며 보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내 두 다리로 하루를 살아낸 느낌이다. 방에 들어서니 공기도 달라 보였다. 발걸음이 만든 기록이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오늘도 무언가를 이룬 건 아니다. 하지만 삶은 꼭 성과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이렇게 나를 다독이며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모여 결국 인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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